홈페이지가 너무 조용해서...
불교집안에 오래도록 몸을 담고 있지만 12연기 만큼은 도통 들어오지 않아 늘 숙제로 남겨두고 있었는데, 우연찮게 무봉당 성묵선사가 읽어보라는 책, <중론, 논리로부터의 해탈 논리에 의한 해탈, 김성철 교수 저>의 '십이연기에 대한 분석' 편을 읽으면서, 무릎을 '탁' 친 일이 있었습니다. (어느 글에서 승가대학 강주스님이, "학인들을 가르치고는 있지만 부끄럽게도 12연기의 가르침을 확실히는 몰랐었는데, 강사가 되어 학인들에게 12연기를 가르친지 3년이 지나면서 '아하, 이런 뜻이구나' 하고 반성했던 적이 있다"는 글을 접하면서 위안을 삼아온 적이 있었지요.)
함께 공부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에 그 부분을 옮겨봅니다.
십이연기에 대한 분석
- 김성철 교수, 「중론, 논리로부터의 해탈 논리에 의한 해탈」
십이인연, 즉 十二緣起란 생명체가 전생·현생·내생에 걸쳐 죽고 태어나는 과정, 행복과 불행을 겪는 원리, 살아가는 방식 등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놓은 부처님의 가르침.
모든 것이 연기적이기에 생명체의 삶도 연기 법칙의 지배아래 있다. 그리고 모든 생명체는 열두 단계를 거치며 윤회하는데 이들 각 단계를 순서대로 배열하면 다음과 같다.
① 無明 → ② 行 → ③ 識 ↔ ④ 名色 → ⑤ 六入 → ⑥ 觸 → ⑦ 受 → ⑧ 愛 → ⑨ 取 → ⑩ 有 → ⑪ 生 → ⑫ 老死
< 三世兩重因果說로 본 12연기 >
단계 | | | |
① 無明 | 이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를 모르는 어리석음 | 전생에 심은 '원인'에 해당 | 전생과 현생간의 인과 관계에 대한 조망 |
② 行 | 無明 때문에 무수한 전생 동안 갖가지 업을 지음 |
③ 識 | 그런 업들은 하나하나가 씨앗처럼 응결되어 우리의 마음에 저장 | 현생에 받는 '결과'에 해당 우리는 전생에 지었던 '원인'대로 몸을 받아 행, 불행이라는 '결과'를 체험하며 살아가는 것 |
④ 名色 | 우리가 전생에 죽었다가 현생에 다시 태어날 때 그런 업의 씨앗들을 가진 영혼이 어머니 자궁속의 수정란과 결합되어 태아로 자라남 |
⑤ 六入 | 임신 후 5주가 되면, 태아에 눈·귀·코 등의 여섯 가지 지각기관이 형성 |
⑥ 觸 | 그 후 열 달이 지나 어머니의 자궁 밖으로 나오면 외부의 대상들을 지각 |
⑦ 受 | 그 후 다시 죽을 때까지 갖가지 괴로움과 즐거움을 느끼면서 살아감 |
⑧ 愛 | 우리의 욕망은 性에 눈을 뜨는 사춘기에 이르러 강력해진다. 사춘기 이후, 性欲·財物欲·名譽欲·宗敎的 欲望 등이 모두 강력해짐 | 현생에 심는 원인에 해당 | |
⑨ 取 | 구체적인 세계관이나 종교관의 틀을 자신의 인생관으로 삼음 | |
⑩ 有 | 제각각의 방식으로 이런 욕망을 성취하면서 평생을 살아감 | |
⑪ 生 | 그런 삶은 욕망을 버린 삶이 아니기에 우리는 해탈하지 못하고 내생에 다시 태어남 | 내생에 받을 결과에 해당 | |
⑫ 老死 | 그리고 또다시 늙어 죽음 | |
※ 전생과 현생의 인과관계와 현생과 내생의 인과관계로 십이연기를 설명하는 방식을 三世兩重因果說이라고 부른다. 전생·현생·내생을 모두 포괄하기에 三世이며, 인과관계가 두 번 중복되기에 兩重因果인 것
지금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는 이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를 모르는 어리석음[①無明] 때문에 무수한 전생 동안 갖가지 업[②行]을 짓는다. 그리고 그런 업들은 하나하나가 씨앗처럼 응결되어 우리의 마음[③識]에 저장되는데, 우리가 전생에 죽었다가 현생에 다시 태어날 때 그런 업의 씨앗들을 가진 영혼이 어머니 자궁속의 수정란과 결합되어 태아[④名色]로 자라난다. 그리고 임신 후 5주가 되면, 태아에 눈·귀·코 등의 여섯 가지 지각기관[⑤六入]이 형성된다. 그 후 열 달이 지나 어머니의 자궁 밖으로 나오면 외부의 대상들을 지각[⑥觸]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게 되어, 그 후 다시 죽을 때까지 갖가지 괴로움과 즐거움을 느끼면서[⑦受] 살아간다. 여기서 無明과 行은 전생에 심은 '원인'에 해당하고, 識· 名色· 六入· 觸· 受는 현생에 받는 '결과'에 해당한다. 우리는 전생에 지었던 '원인'대로 몸을 받아 행, 불행이라는 '결과'를 체험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① '無明'에서 시작하여 ⑦ '受'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은 전생과 현생간의 인과 관계에 대한 조망이다. 그리고 이후 ⑧ '愛'에서 ⑫ '老死'까지의 과정은 현생과 내생간의 인과 관계에 대한 조망이다.
우리는 평생을 살면서 우리에게 체험되는 것들 가운데 좋은 것은 추구하고, 나쁜 것은 배척한다. 이런 마음이 욕망이다. 그런데 우리의 욕망은 性에 눈을 뜨는 사춘기에 이르러 강력해진다. 사춘기 이후, 性欲· 財物欲· 名譽欲· 宗敎的 欲望 등이 모두 강력해진다[⑧愛]. 그리고 구체적인 세계관이나 종교관의 틀[⑨取]을 자신의 인생관으로 삼아 제각각의 방식으로 이런 욕망을 성취하면서 평생을 살아간다[⑩有]. 그러나 그런 삶은 욕망을 버린 삶이 아니기에 우리는 해탈하지 못하고 내생에 다시 태어난다[⑪生]. 그리고 또다시 늙어 죽는다[⑫老死].
이렇게 전생과 현생의 인과관계와 현생과 내생의 인과관계로 십이연기를 설명하는 방식을 三世兩重因果說이라고 부른다. 전생·현생·내생을 모두 포괄하기에 三世이며, 인과관계가 두 번 중복되기에 兩重因果인 것이다.
또 십이연기의 이런 각 항목들은 지금 이 순간에 함께 작용하기도 한다. 지금 이 순간의 나는 무한한 전생에서 시작한 ①무명에 덮여 있고, 전생에 지었던 나의 모든 행위[②업]들은 마치 밭에 뿌려진 씨앗과 같이 발아를 기다리며 지금 이 순간의 나의 마음[③식]속에 간직되어 있으며,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형성[④명색]된 후 지금까지 성장해 온 나의 몸은 임신 5주째의 태아 상태에서 생성되었던 여섯 가지 지각기관[⑤육입]을 모두 갖고 있다. 출산 후 비로소 열린 지각기관은 지금도 그대로 작용하고 있고[⑥촉], 그런 지각기관을 통해 온갖 희로애락을 느끼며[⑦수] 살아간다. 그와 아울러 사춘기 때부터 시작하는 강력한 욕망[⑧애]이 지금도 끊임없이 분출되고, 그런 욕망을 실현시켜 주는 구체적인 인생관[⑨취]에 따라 매일 매일을 살아간다[⑩유]. 전생의 나도 태어났다 죽었지만, 현생에 태어난 나도 결국 죽을 것이고, 내생에 태어날[⑪생] 나도 결국 죽을 것이다[⑫노사].
십이연기의 각 항목들은 전생과 현생과 내생에 걸쳐 펼쳐져 있기도 하지만, 이렇게 지금 이 순간에 동시에 쌓여 있기도 하다. 이런 열두 가지 항목 가운데 ①무명과 ②행은 전생에 심은 원인에 해당하고, ③식 · ④명색 · ⑤육입 · ⑥촉 · ⑦수는 현생에 받을 결과에 해당하며, ⑧애와 ⑨취와 ⑩유는 현생에 심는 원인에 해당하고, ⑪생과 ⑫노사는 내생에 받을 결과에 해당한다.
그러면 이상과 같은 기초 지식의 바탕위에서 제26 <觀十二因緣品>에 기술된 십이연기에 대한 용수의 설명을 하나하나 풀이해 보자.
모든 중생은 ①無明에 덮여
내생을 위해 세 가지 ②業을 짓는다.
그리고 그 업에 따라
六道로 간다.
衆生癡所覆 爲後起三行 以起是行故 隨行墮六趣.
- MK. 26-1
여기서 ①無明이란 無知라고도 번역되며 위에서 설명했듯이 어리석음을 의미한다. 무엇이 악한 행동인지 모르고 무엇이 선한 행동인지도 모르며, 四聖諦도 모르고, 三寶도 모르는 것이 無明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이 세상의 참모습과 이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를 전혀 모르는 것이 무명이다.
그리고 이런 어리석음 때문에 갖가지 ②업을 짓게 된다. 업이란 행위를 의미하며 行이라고도 부른다. 가치론적으로 볼 때는 福行 · 非福行 · 不動行의 셋으로 나누어지고, 행위가 일어나는 장소로 구분하면 몸으로 짓는 행위[身業], 입으로 짓는 행위[口業], 생각으로 짓는 행위[意業]의 셋으로 구분된다. 이 가운데 '福行'이란 착하고 고결한 행위를 의미하고, '非福行'이란 악하고 비열한 행위를 의미하며, '不動行'이란 색계나 무색계에 태어나게 만드는 선정을 가리킨다. 몸과 입과 생각으로 짓는 세 가지 행위 각각이 다시 福行 · 非福行 · 不動行의 세 가지로 구분되기에 모두 아홉 가지 행위가 있게 된다. 그리고 복행과 비복행의 양과 질에 따라 내생에 천상· 인간· 아수라· 짐승· 아귀· 지옥의 여섯 가지 세계[六道] 가운데 어느 한 곳에 태어난다.
②行들을 조건으로 삼는
③識이 육도의 몸을 받는다.
식이 부착되기에
④名色이 자라난다.
以諸行因緣 識受六道身 以有識著故 增長於名色.
- MK. 26-2
그 어떤 행위[行]을 하더라도 우리의 마음[識]에 그 행위가 새겨진다. 내가 기억을 못해도 우리의 깊은 마음은 지금까지 평생 내가 한 행위 모두를 저장하고 있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이 인생'이란 말이 있다. 그러나 이는 '손'에만 해당하는 얘기다. 우리가 태어나고 죽을 때 손은 비어있을지 몰라도 우리의 '마음[識]'은 가득 차 있다. 우리가 태어날 때 우리의 마음은 전생에 지었던 행위의 씨앗으로 가득 차 있고, 우리가 죽을 때에는 현생에 지은 행위의 씨앗으로 가득 차 있다. 우리가 태어나면 그런 씨앗들이 하나하나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며 우리가 체험하는 일평생의 길흉화복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위 게송에서 "② 行들을 조건으로 삼는 ③ 識"이란 말은 나의 행위 하나하나가 나의 마음에 저장되는 과정을 의미하며, "③ 識이 육도의 몸을 받는다."는 말은 그렇게 저장된 행위의 씨앗이 싹을 틔울 세계에 우리가 태어나는 것을 가리킨다. 평생 착하고 고결하게 살았다면 육도 중 하늘나라나 인간계에 태어나고, 악하고 저열하게 살았다면 짐승이나 아귀, 지옥 중생으로 탄생한다. 인간을 예로 들면,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정자와 난자가 결합하여 수정란이 될 때 그 수정란에 識이 부착되는 것이 탄생의 순간이다. 이 識은 사망과 탄생의 중간에 있는 존재란 의미에서 中陰身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중음신 역시 오온을 모두 갖추고 있지만, 우리의 몸에 해당하는 色蘊이 희박하고 미세하기에 일반인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사람이 죽으면 이런 중음신으로 떠돌다가 49일째 되는 날 어머니의 자궁 속으로 들어간다. 우리의 전통 장례의식 중 하나인 '49재'는 이런 내세관에서 유래한 것이다.
識이 자궁 속에 들어가 수정란에 부착되면, 그 수정란은 하나의 생명으로서 성장하기 시작한다. 이때 식이 부착된 수정란을 ④名色이라고 부른다. 名이란 정신을 의미하고 色이란 육체를 의미한다. DNA라는 물질 덩어리[色]였던 수정란에 식[名]이 부착됨으로써 비로소 생명이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위 게송에서 "식이 부착되기에 ④名色이 자라난다."는 말은 이를 의미한다. 정자와 난자가 결합하여 수정란이 생겨도 그에 맞는 중음신이 없으면 그 수정란은 생명으로 자라지 못하고, 중음신이 있어도 수정란이 없으면 그 중음신은 새로운 생명을 받을 수가 없다. 이렇게 중음신과 수정란은 상호의존 관계에 있다.
그래서 경전에서는 "식이 있기에 명색이 있고 명색이 있기에 식이 있다[識 ↔ 名色]."고 가르치는 것이다.
④명색이 자라나기에
⑤육입이 발생한다.
육입에 의존하여
⑥촉이 나타난다.
名色增長故 因而生六入 情塵識和合 而生於六觸.
- MK. 26-3
식이 부착된 수정란, 즉 ④ 名色은 탯줄을 통해 영양을 공급받으며 자궁 속에서 성장한다. 《구사론》에서는 임신 5주가 될 때까지 성장하는 명색에 대해 단계별로 다음과 같이 명명한다.
제1주 : 갈랄람(羯剌藍, Kalala)
제2주 : 알부담(頞部曇, Arbuda)
제3주 : 폐시(閉尸, Pesi)
제4주 : 건남(鍵南, Ghana)
제5주 이후 : 발라사구(鉢羅奢佉, Prasakha)
임신 5주가 되어 발라사구 단계의 태아가 되면 비로소 눈·귀·코 등 여섯 가지 지각기관, 즉 ⑤六入이 분화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10개월이 차면 어머니의 몸 밖으로 나온다. 그 후 어린아이의 모든 지각기관은 대상과의 ⑥ 접촉觸을 시작한다. 눈은 형상과 접촉하고, 귀는 소리와 접촉하며, 코는 냄새와 접촉하고, 혀는 맛과 접촉하며, 몸은 촉감과 접촉하고, 생각하는 작용은 생각된 내용과 접촉한다. 이렇게 여섯 가지 지각기관이 여섯 가지 지각대상과 접촉하는 과정을 위 게송에서는 "육입에 의존하여 촉이 나타난다."고 표현하였다.
여섯 가지 ⑥觸으로 인해
세 가지 ⑦受가 발생한다.
세 가지 수로 인하여
⑧愛가 발생한다.
因於六觸故 卽生於三受 以因三受故 而生於渴愛.
- MK. 26-4
여섯 가지 지각기관 가운데 눈을 예로 들어 설명해 보자. 시각대상인 형상과 색깔이 눈과 만났다고 해서 무엇이 눈에 보이는 것은 아니다. 정신인 識이 관여해야 한다. 이렇게 시각대상인 색과 시각기관인 눈과 정신인 식의 세 가지가 합쳐질 때 비로소 우리는 무엇을 보게 된다. 지각기관과 지각대상 그리고 그 각각에 해당하는 識의 세 가지가 합쳐지는 것을 '觸'이라고 부른다. 지각기관에 눈·귀·코·혀·몸·작용의 여섯 가지가 있기에 촉도 그 종류가 여섯 가지로 된다.
그리고 이런 촉이 발생할 때, 우리는 그것에서 괴롭거나 즐거운 ⑦느낌[受]을 받게 되는 것이다. 위 게송에서 말하듯이 "여섯 가지 ⑥ 觸으로 인해 세 가지 ⑦ 受가 발생한다." 受의 단계에서는 아직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모른다. 단지 괴롭다거나 즐겁다거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다고 느낄 뿐이다. 이를 각각 苦受(괴로운 느낌) · 樂受(즐거운 느낌) · 不苦不樂受(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라고 부른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세 가지 느낌[受] 가운데서 樂受, 즉 즐거운 느낌이 드는 것을 좋아하고 괴로운 느낌이 드는 것을 싫어한다.
이렇게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속의 에너지가 ⑧ 愛(욕망)이다. 이런 '愛'는 위의 게송에서 말하듯이 세 가지 '受'로 인해 발생한다. '물건을 보면 마음이 동한다[見物生心]'는 속담에서 물건을 보는 것은 受[느낌]에 해당하고 마음이 동한다는 것은 愛[욕망]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愛에는 식욕이나 성욕과 같이 욕계의 차원에 속하는 욕망도 있지만, 내생에 색계나 무색계와 같은 하늘나라에 태어나고 싶은 욕망도 있다. 거꾸로 삶이 너무 괴로워서 자살하고 싶은 욕망도 있다. 이를 순서대로 欲愛 · 有愛 · 無有愛라고 부른다.
⑧愛로 인해 네 가지 ⑨取가 존재하며
취로 인해 ⑩有가 존재한다.
만일 취하는 자가 취하지 않으면
해탈하여 유는 존재하지 않으리라.
因愛有四取 因取故有有 若取者不取 卽解脫無有.
- MK. 26-5
欲愛 · 有愛 · 無有愛의 세 가지 ⑧ 욕망(愛)이 보다 구체적으로 변하면 ⑨ 取가 된다. 取에는 욕애가 구체화된 노골적인 欲取, 욕망의 실현을 위해 나름대로 어떤 세계관을 갖는 見取, 각종 종교에서 가르치는 수행규범이나 의식절차를 준수하려는 戒禁取, 각종 종교에서 가르치는 자아관을 신봉하는 我語取의 네 가지가 있다.
그리고 이런 취에 입각하여 살아가는 것이 ⑩ 有이다. 有란 생존이란 의미로, 내생을 위해 특정한 방식의 삶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性欲·식욕·재물욕·명예욕·수면욕 등의 오욕락을 전혀 버리지 못한 채 살아가는 사람은 내생에 삼계 가운데 욕계에 태어난다. 죄업을 많이 짓는 경우는 욕계 중 삼악도인 축생 · 아귀 · 지옥의 세계에 태어나며, 오욕락을 버리지 못했어도 남에게 많이 베풀고 윤리 도덕을 잘 지키며 고결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욕계 가운데 인간계나 六欲天의 하늘나라에 태어난다.
또 색계의 하늘나라에 태어나고 싶은 사람은 이성에 대해 관심이 없고, 음식에 대해 욕심을 내지 않으며, 항상 남에게 즐거움을 주고[慈], 남의 슬픔에 공감하여 이를 제거해 주기위해 노력하며[悲], 남의 행복에 대해 기뻐하고[喜], 나와 남을 평등하게 보는[捨] 마음을 완성하거나 坐禪 수행을 하면 어느 정도의 경지에 오를 수 있어야 한다.
무색계에 태어나고 싶은 사람은 색계의 선정을 완성함은 물론이고 그보다 더 깊은 삼매를 닦으며 살아가야 한다. 이런 삶을 순서대로 欲有(욕계를 초래하는 삶) · 色有(색계를 초래하는 삶) · 無色有(무색계를 초래하는 삶)라고 부른다.
그러나 욕계든 색계든 무색계든 모두 윤회의 세계일뿐이다. 착하고 고결하게 살고 열심히 명상수행을 하여 삼계 가운데 그 어디에 태어났다고 해도 자신이 쌓은 선행과 수행의 힘이 다하면, 수십, 수백, 수천년 후 반드시 다시 밑의 세계로 떨어지고 만다. 따라서 불전에서는, 모든 생명체의 최종목표는 내생에 하늘나라에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든 인간의 세계든 아예 윤회의 세계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생에 삼계에 다시 태어나게 만드는 방식의 삶을 살아서는 안 될 것이다. 다시 말해 욕계를 초래하는 삶이든, 색계를 초래하는 삶이든, 무색계를 초래하는 삶이든 그 어떤 방식도 취하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取를 제거해야 한다. 왜냐하면 취에 의존하여 삼계를 초래하는 有(특정한 방식으로 살아감)가 있기 때문이다. 취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욕망을 구체화한다든지[欲取], 어떤 세계관을 고집한다든지[見取], 특정 종교의 규범이나 의식을 추종한다든지[戒禁取], 아뜨만과 같은 자아가 있다는 생각을 갖는다든지[我語取] 해서는 안 된다. 이런 네 가지 취가 사라질 때 有도 사라지고 해탈하여 다시는 윤회의 세계에 태어나지 않는다. 앞의 게송에서 말하듯이 "취하는 자가 취하지 않으면 해탈하여 유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해탈이고 열반이다.
십이연기의 흐름에서 우리가 조절하기 쉬운 것은 '애 · 취 · 유'의 세 가지이다. 앞의 '무명과 행'은 전생에 발생한 것이고, '식과 명색과 육입과 촉과 수'는 전생에 지었던 업의 과보로 현생에 받은 것이기 때문에 조절이 쉽지 않다. 그러나 '현생에 짓는 것'인 '애 · 취 · 유'의 세 가지는 현생에 우리의 마음 밭에 심는 씨앗과 같은 것들이기에 우리가 마음먹기에 따라 쉽게 조절된다. 그리고 우리의 분별적 사고방식을 비판하는 《중론》은 이 세 가지 가운데 取에 해당하는 갖가지 세계관이나 자아관을 정화하고 제거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그러나 取를 제거하지 못하면, 우리는 삼계를 초래하는 삶[有]을 살게 되고, 결국 다시 태어나[生] 늙어 죽는 일[老死]을 되풀이 한다.
⑩유로부터 ⑪생이 존재하며
생으로부터 ⑫노사가 존재한다.
노사가 있기에
근심과 슬픔 등 갖가지 고가 있게 된다.
從有而有生 從生有老死 從老死故有 憂悲諸苦惱.
- MK. 26-6
석가모니 부처님은 어린 시절 왕궁 밖을 유람할 때, 노인과 병자와 시체를 보고는 깊은 슬픔에 잠겼다가 수행자의 맑은 모습을 보고 환희심을 내어 출가를 결심하게 된다. 아무리 젊고 아름답고 건강한 사람도 나이가 들면 늙고 병들어 죽는다. 이는 비단 사람뿐만 아니라, 짐승이든 하늘나라에 사는 천신이든 모든 생명체가 겪어야 하는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모든 생명체는 탄생과 늙음과 질병과 죽음[生老病死]을 무한히 되풀이한다. 그래도 인간으로 태어나면 큰 불행을 겪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온 우주 가득히 존재하는 무한수의 생명체가 끝없이 삶과 죽음을 되풀이하는 윤회의 세계에서 60억명 정도에 불과한 인간으로 태어나는 일은, '눈먼 바다거북이 나무판자를 만나는[盲龜遇木]' 비유에서 가르치듯이 지극히 희귀한 일이다.
현생에 아주 착하게 살지 않은 이상 전 인류 대부분은 내생에 짐승 이하의 상태로 태어난다. 짐승의 삶이 생명의 세계에서 평균적 삶이기 때문이다. 이런 절대적 苦에 대한 자각이 깊을 때, 우리는 다시 태어나지 않는 열반을 희구하게 된다.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다시는 십이연기의 열두 가지 사슬을 되풀이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십이연기 가운데 제일 첫 번째 사슬인 무명을 끊어야 한다. 어리석음을 제거해야 한다. 용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런 모든 것들은
다 태어남[生] 때문에 존재한다.
그리고 이로 인해
오직 苦뿐인 오온이 발생한다.
如是等諸事 皆從生而有 但以是因緣 而集大苦陰.
- MK. 26-7
무명에 물든 자는
윤회의 뿌리인 갖가지 업을 짓는다.
그러나 지혜로운 자는 진실을 알기에
그런 업을 짓지 않는다.
是謂爲生死 諸行之根本 無明者所造 智者所不爲.
- MK. 26-8
이것이 소멸하면
저것은 발생하지 않는다.
그래서 오직 고뿐인 오온
역시 제대로 사라진다.
以是事滅故 是事則不生 但是苦陰聚 如是而正滅.
- MK. 26-9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는 모든 고통들, 그리고 앞으로 닥치게 될 늙음과 질병과 죽음의 고통 모두 그 근본 원인은 우리가 태어났다는 데 있다. 모든 생명체는 오온으로 이루어져 있기에 苦에서 벗어날 수 없다. 오온은 매 찰나 변한다. 오온은 모두 생로병사한다. 따라서 오온 가운데서 우리가 부여잡고 쉴 만한 곳은 찾을 수 없다. 오온 가운데 어느 하나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오온에서 벗어나는 것만이 영원한 행복, 영원한 안락의 길이다. 이것이 열반이다.
오온은 궁극적으로 모두 고를 야기할 뿐이라는 윤회의 진상[苦]을 훤히 알고, 우리로 하여금 윤회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윤리[戒]'와 '명상[定]'과 '지혜[慧]'의 수행인 八正道를 그대로 실천하여 윤회의 원인인 모든 번뇌[集]를 끊을 경우 우리는 열반[滅]에 도달하여 더 이상 윤회의 고통을 겪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연기공식에서 말하듯이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은 발생하지 않는다.' 십이연기의 사슬에서 제일 처음에 위치한 무명이 사라지면 윤회하는 오온의 세계는 더 이상 발생하지 않는다.
무명을 제거한 지혜로운 수행자는 더 이상 업을 짓지 않는다. 인과응보의 세계에서 고를 초래할 악행도 하지 않지만, 수행자로서 착하고 고결하게 살아가는 동안에도 업을 지었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착한 일을 하지만 티가 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모든 것이 공하기 때문이다. 해도 하는 것이 없다. 베풀긴 하지만 베풀었다는 생각이 없다.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도 모를 뿐 아니라 오른손 자신도 모른다. 마치 어머니가 다친 자식을 간호할 때와 같이 착한 일을 하고도 자신이 착한 일을 했다는 생각을 내지 않는다. 이것이 무명을 타파한 지혜로운 자가 살아가는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