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변혁과 불교
지난 몇 달간 영화 레 미제라블이 많은 사람들의 화제가 되었다. 좋은 영화가 그렇듯이 이 영화에 대한 감상도 다양하였다. 민중의 연대와 혁명의 감동을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 가하면 또 어떤 사람들은 자베르가 지켜내고자 하는 법과 질서 그리고 장발장으로 상징되는 종교와 구원이 격렬하게 길항하는 근대 유럽 사회의 한 단면을 읽어내고자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한편 레 미제라블이 주는 감동중의 하나는 ‘사랑의 힘’이다. 그 사랑은 남녀의 사랑에 국한되지 않는다. 예수가 인류에게 그리고 밀리에르 신부가 장발장에게 보여주었던 인간에 대한 조건 없는 사랑은 이 세상에 대한 장발장의 분노와 증오의 마음을 사랑으로 바꾸어 놓는다. 그리고 장발장은 이 혼탁한 세상에서 스스로 ‘사랑의 실천가’가 된다. 바로 이 사랑의 실천이 확연하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레 미제라블 전체를 일관하고 있는 주제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영화는 우리에게 사랑은 실천을 통해 확산되어가는 것이며, 분노와 증오심을 이기고 인간세상을 ‘살만한 곳’으로 바꾸어 놓는 힘이라는 것을 설득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레 미제라블은 한편의 잘 만들어진 기독교 선교영화라고도 할 수 있다. 사랑은 기독교 정신의 한 핵심이자 기독교가 이 세계와 관련하는 정신으로 서구역사에 있어 사회의 변혁과 개혁을 이끄는 중요한 이념적 원천이 되어왔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근본 가르침이 사랑이라면 불교의 근본 가르침은 무엇일까? 아마도 한국의 불교인 상당수가 지혜라고 답할 것이다. 사실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라고 하고 불교를 지혜의 종교라고 하는 것은 거의 상식처럼 되어 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사랑과 지혜는 그 함축하고 있는 의미의 결이 매우 대조적이다. 사랑이 ‘동적인’ 행위와 실천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면 지혜는 ‘정적인’ 인지(認知)의 상태를 의미한다. 물론 불교에서 의미하는 ‘지혜’는 어떤 인지적 상태를 의미하는 ‘정적인 것’만은 결코 아니다. 불교에서 의미하는 지혜는 ‘정적인 것’과 ‘동적인 것’ 두 가지를 다 의미하고 있다. 적적(寂寂)함이 정적인 의미의 지혜라면 성성(惺惺)함이란 바로 동적인 의미의 지혜를 말한다. 그리고 실천의 측면에서 지혜는 늘 ‘지혜의 이면’이라 할 자비[의 행위]를 강조하고 있다. 이 자비는 기독교의 사랑에 대응하는 불교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지혜와 사랑이 각각 불교와 기독교를 대조하는 표현이라고 흔히 말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두 종교 모두 실천의 측면에서 지혜와 사랑(혹은 자비)을 ‘수레의 두 바퀴’ 혹은 ‘새의 양 날개’로 비유하면서 상호보완적인 관계로 이해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경우 때로 지혜를 결한 사랑이 얼마나 맹목적이며 파괴적일 수 있는 지를 역사를 통해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불교의 경우 자비를 결한 지혜가 얼마나 공허할 수 있으며 약자의 고통을 외면하고 침묵으로 지배 권력에 협조할 수 있는지 잘 알고 있다.
부처님의 깨달음은 인지적(認知的)인 것이면서 또한 실천수행적인 것이다. 연기법이란 그러한 ‘상태’를 인지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행위’를 반드시 필요로 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깨달음의 지혜로 인지하신 중생들의 실상은 곧바로 중생제도라고 하는 실천행위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처님의 경우 지혜는 곧 실천과 동반하는 것으로 실천 없는 지혜나 지혜 없는 실천은 가능하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깨달음의 궁극적 완성은 실천 즉 중생제도와 같은 자비의 실천에 있는 것이다. 불교의 핵심 철학으로 알려져 있는 무아(無我) 또한 마찬가지이다. 존재란 실체가 아니라 행위라는 것이 바로 무아의 핵심적 의미이다. “행위는 있되 행위자는 없다”라고 하는 『청정도론』의 한 구절이 의미 하는 바 또한 마찬가지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한국불교인의 상당수가 무아의 의미를 단순히 ‘인지적인’ 어떤 지식정도로만 여기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행위가 배제되거나 행위를 결한 깨달음은 깨달음이 아니다. 지혜와 자비가 함께 동반되지 않는 깨달음은 기껏해야 신비체험의 일종일 뿐 부처님께서 보여주신 본래적인 불교적 깨달음이라고 할 수 없다.
유심(唯心)은 본래 이 세계의 현상이 실체적이거나 고정적인 것이 아님을 깨닫게 함으로써 변혁과 개혁을 통해 향상 된 세계를 추구하게 하는 가르침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전근대 동아시아 유교적 세계관에 따르면 출생에 의한 신분, 권력에 의한 차별은 그 자체 자연의 섭리로서 그대로 지켜져야 하는 것이었다. 불교적 세계관 그리고 유심(唯心)은 그러한 유가의 종법적 질서의 허위를 간파하고 새로운 세계를 꿈꾸는 변혁의 에너지로 전환 될 수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시도되지 못하였다. 유심(唯心)에 대한 관념적 이해는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다. 유심(唯心)에 대한 해석은 ‘삼계허망’과 함께 사회적 구원이 아닌 개인적 수행에만 몰두해야할 교리적 근거로서 기능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행위가 배제된 수행, 자비가 결여된 지혜는 어떠한 종파적 이유로도 정당화 될 수 없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불교는 불교가 ‘지혜의 종교’라는 미명하에 ‘지혜’를 갖추는 데에만 몰두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앞 서 언급한대로 불교에서의 지혜는 ‘인생의 지혜’와 같은, 관조적이거나 수동적인 지혜가 아니다. 자비와 같은 능동적 행위가 동반하는 지혜이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불교 수행의 대부분은 이 세계를 ‘설명’하기 위한 이치 탐구에 집중되고 있다. 그러다 보니 화두 들고 선방에 앉아있는 것이 곧 불교라고 생각하거나 교리를 공부하고 경전을 통해 이 세상의 이치를 ‘이해’하는 것이 곧 불교라고 생각하고 있다. 여기서 좀 더 나은 경우라고 해야 이치를 안 다음에 비로소 실천이 가능하다고 하면서 실천을 ‘다음의 일’로 미루어 놓은 경우이다. 하지만 엄밀하게 말한다면 ‘안다’는 것과 ‘실천’이라는 것은 전후의 문제로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최근 어느 스님께서 “불교란 깨달음을 추구하는 종교가 아니라 깨달음을 실천하는 종교”라고 하신 말씀은 오늘날 한국불교의 병통을 적확하게 지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 사족을 더 한다면 깨달음이란 지혜가 동반하는 실천이며 실천이 동반하는 지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반도를 포함하여 동아시아 불교의 역사를 냉정하게 돌이켜 보건대 불교가 사회를 변혁하는 에너지의 원천으로서의 역할을 한 적은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어쩌면 신라 및 통일신라의 일부 시대가 유일한 예외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다. 여기에는 불교의 소극성만을 탓할 수 없는 전근대 동아시아 사회의 특수한 역사적 사정이 있다. 불교 전래 이전 이미 동아시아 사회는 유가적인 종법적 질서 체제로서 구축되어있었으며 따라서 불교의 기능은 주로 ‘안심입명’의 개인적 수양에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점은 불교가 발생한 고대 인도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부처님 당시 고대인도 사회는 출가와 재가의 이원적 구조가 정착되던 시점이었다. 어린 싯다르타의 미래를 ‘전륜성왕의 길’과 ‘부처의 길’을 ‘양자택일’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는 아시타 선인의 관점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기원 전후 등장하였던 대승불교 운동은 이러한 불교의 대사회적 소극성을 극복하고자 나선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러한 야심찬 대승의 기획은 역사적으로 실현되지는 못한 채 일종의 ‘세계관’으로서만 도아시아에 전파되었던 것이다.
과거 불교의 역사가 그렇다고 해서 오늘날 한국불교의 대사회적 소극성을 용인하거나 정당화 할 수는 없다. 그것은 우선 부처님의 삶과 가르침을 지나칠 만큼 보수적으로 해온 불교전통의 잘못이며 다른 한편으로 지금 현대 사회가 불교의 적극적인 사회참여를 기대하고 또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 이상 불교가 이 세계에 대한 관념 혹은 또 세계관으로서만 머물러서는 안 되며 근대문명의 폐해를 극복하는 새로운 대안적 문명을 만들어 가기 위한 실천의 역할을 불교에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불교의 존재 이유는 이 세계의 이치에 대한 ‘설명’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 세계를 변혁하는데 있다. ‘중생의 세계’로 부터 ‘부처의 세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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