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선우 릴레이 힐링법회] 2강 월호 스님
정신가치에 중점 둔 실천하는 삶이 보살
생활수행과 불교의 현대적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한 길을 걸어온 우리는선우가 창립21주년을 기념해 이 시대 멘토 7명을 초청, 릴레이 힐링법회를 열고 있다. 고통의 원인을 분석하고 치유법을 나누는 힐링법회 내용을 요약 게재한다.
중생으로 살고자 하면 / 중생에 머물수밖에 없고 / 부처가 되겠다 서원하고 / 보살의 삶 살면 보살 돼 / 선택은 오로지 본인의 몫
월호 스님
동국대 선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쌍계사 조실 고산 스님으로부터 강맥을 전수 받았다. 현재 쌍계사 승가대학 교수이자 행불선원 원장을 맡고 있다. 주요저서로는 ‘영화로 떠나는 불교여행’, ‘언젠가 이 세상에 없을 당신을 사랑합니다’, ‘문 안의 수행 문 밖의 수행’ 등이 있다.
우리가 법회 때마다 독송하는 반야심경의 원래 제목은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입니다. 직역하면 마하는 ‘위대한’이고, 반야는 ‘지혜’, 바라밀다는 ‘피안을 건너다’, 심경은 ‘마음의 경전’이라는 의미로 ‘위대한 지혜로써 피안으로 건너가는 마음의 경전’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경전에 나타나 있는 의미를 살려 의역을 하게 되면 반야심경은 ‘모든 고통을 사라지게 하는 경전’이라고 풀이됩니다. 부처님께서 반야심경을 설한 이유가 곧 중생의 모든 고통을 사라지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반야심경은 부처님이 말씀하신 팔만대장경의 핵심을 담고 있는 경전인 셈입니다. ‘탄생게’에서도 밝혔듯 부처님이 이 땅에 오신 근본 이유가 중생의 고통을 사라지게 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이에 대해 부처님은 반야심경에서 중생들이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위대한 주문을 외우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가자, 가자, 건너가자, 완전하게 건너가자, 깨달음을 성취하자(가떼, 가떼, 빠라가떼, 빠라쌍가데 보디 쓰와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세상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언제 어느 때나 항상 이 주문을 외워야 하는 것입니다. 화가 나고, 탐욕이 생기고, 얄미운 사람이 생길 때도 계속해서 이 주문을 외워야 합니다.
저는 이 주문을 조금 더 보완해 “가자, 가자, 건너가자, 완전하게 건너가자, 입자에서 파동으로”라고 외울 것을 강조합니다. 입자의 삶에서 파동으로 삶으로 넘어서자는 것입니다. 입자의 삶이란 물질적인 것에 초점이 맞춰진 삶, 내 것을 중심으로 내 가족만을 위해 사는 삶입니다. 반면 파동적인 삶은 정신적 가치에 중점을 두고 늘 다른 사람들과 교유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파동적인 삶은 이타행을 중심 가치로 두고 보살행을 실천하는 삶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삶은 입자로서의 삶이 아니라 파동으로서의 삶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과학에서와 마찬가지로 불교에서도 모든 현상에 대해 잘게 분해해 분석을 합니다. 인간을 구성하는 요소도 오온, 육근, 12처, 18계로 구분합니다. 왜냐면 나라고 할 만 한 고정된 실체, 즉 아트만을 찾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그런 것은 없습니다.
반야심경에서도 그걸 말하고 있습니다. “눈 귀 코 혀, 몸과 마음 또한 없고, 형상 소리 냄새와 맛, 감촉과 대상도 없으며, 눈의 세계 내지는 의식의 세계까지도 없느니라.~”이것이 그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것이 늘 변하기 때문입니다. 우주도 성주괴공(成住壞空)하고, 사람의 몸도 생로병사하고, 마음 역시 생주이멸(生住異滅)하는 것처럼 모든 것은 계속 변하고 있습니다. 고정된 실체가 없습니다. 그러니 나라고 할 만한 것도 자연 없는 것입니다.
최근 과학자들이 우리 몸의 세포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우리 몸을 구성하는 세포 가운데 하나를 잘게 쪼개 가장 작은 미립자를 발견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미립자가 입자일지, 파동일지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신기한 일이 생긴 겁니다. 현미경을 놓고 관찰을 하는 데 당연히 입자라고 생각한 사람이 봤을 때는 입자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파동이라고 예견한 사람이 관찰하면 파동의 특징이 나타난 것입니다. 이를 물리학에서는 관찰자 효과라고 합니다. 불교에서는 이를 일체유심조라고 하지요.
여기서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결국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 스스로 입자라고 여기고 입자의 삶을 살면 거기에 머무를 수밖에 없고, 반대로 스스로 가능성을 가지고 파동의 삶을 살면 자신의 삶을 변화할 수 있는 것입니다. 중생으로 살고자 한다면 중생에 머무를 수밖에 없고, 스스로 부처가 되겠다고 서원을 세우고 보살의 삶을 살면 보살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한 선택은 오직 본인 스스로 하는 것입니다.
초기불교에서는 사람의 특징을 크게 세 종류로 나누고 그런 사람들의 에너지 특성을 분석해 놓았습니다. 욕심이 많은 탐행자(貪行者)와 화를 잘 내는 진행자(嗔行者), 어리석은 치행자(痴行者)가 그것인데, 탐행자는 자기 마음에 드는 것을 끌어당기는 에너지가 강한 특성이 있고, 진행자는 그 반대로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을 밀어내는 에너지가 강합니다. 치행자는 어리석어 더딘 사람입니다. 그래서 경전에서는 탐행자의 경우 욕심이 많기 때문에 부정관을 닦아야 하고, 진행자는 자비관을, 치행자에 대해서는 수식관을 닦으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성품은 이미 전생에서부터 가져온 습이기 때문에 고치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느냐. 자신이 가지고 있는 부정적인 에너지를 효과적인 바른 방향으로 돌리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흔히 불교 수행을 관찰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즉 자신의 몸과 마음, 성품을 관찰하는 훈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각각의 훈련은 어떻게 하는 것이냐면, 일단 몸을 해체해서 보는 것입니다. 눈과 귀, 코, 혀 등 몸 전체를 하나하나 해체해 각각을 관찰함으로써 ‘나’라고 할 만한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것을 확인해 나가는 것입니다. 또 마음은 묶어서 관찰해야 합니다. 마음은 변화가 많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코 밑을 집중하면서 마음이 그곳에 있다고 집중하고 늘 관찰하는 훈련을 진행하다보면 마음을 묶어 보는 것이 가능해 집니다. 다음으로 성품은 스스로를 돌이켜보는 훈련입니다. 이렇듯 몸은 해체해서 보고, 마음은 묶어서 보고, 성품은 돌이켜 보는 것 이것이 불교수행의 기본입니다.
불교의 핵심은 인과와 중도입니다. 반야심경 역시 중도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정된 실체가 없다. 다만 현상이 존재할 뿐이다. 그러니 모든 중생의 고통은 현상을 좇는데서 나오는 것으로 나라고 할 만한 실체가 없음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은 스스로 결정하는 것입니다. 중생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입자의 삶을 살아갈 것인가, 보살의 서원을 세워 파동적 삶을 살 것인가는 이제 여러분의 선택에 달린 것입니다.